[독서신문 = 황태영 수필가] 세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본 뒤 각자의 의견을 말했다. 먼저 다리를 만진 장님이 "코끼리는 기둥처럼 생겼다"고 했다. 그러자 귀를 만진 장님이 "기둥이 아니라 부채처럼 생겼다"고 했다. 배를 만진 장님은 "담벼락처럼 생겼다"고 했다. 코끼리를 직접 본 한 사람이 세 장님이 모두 틀렸다고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세 장님이 모두 맞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세 장님이 모두 코끼리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다 틀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코끼리는 세 장님이 말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또한 그 주장들은 다 맞다고도 할 수가 있다. 이렇듯 동일한 사안도 보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가 나온다. 어느 한쪽 편을 든다거나 자신의 주장을 고집할 때는 그만큼 숙고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성냥개비는 굵은가, 가는가?' 모두들 성냥개비는 가늘고 작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쑤시개로 쓰고자 하면 굵을 것이요, 대들보로 쓰고자 하면 한없이 가늘 것이다. 개미의 눈에는 거대할 것이고 곰의 눈에는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쓰임새나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굵을 수도 있고 가늘 수도 있다. 같은 크기의 빵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크게 보일 수 있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작게 보일 수 있다. '크다, 작다'를 내 기준에만 맞추어 강요하고 윽박지른다면 어떤 사회, 어떤 조직도 유지되기 어렵다. 따라서 나와 다르다고 배척해서는 아니 된다. 나와 다름을 통해 새로운 지혜를 축적해가야 한다.
백인들은 얼룩말을 보고 "흰색 바탕에 검정색 줄"이라고 하지만 흑인들은 "검정색 바탕에 흰색 줄"이라고 한다. 모두가 다 자신을 중심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다르다'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남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름은 다름으로 보아야지 틀림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나 IQ, 학벌, 재력 등 자기가 좋아하는 단 하나의 잣대로만 사람을 평가하려 한다면 모두 '맞다, 틀리다'로 구분을 짓게 된다. 틀림의 배척은 다툼만 깊어지고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휴대폰 외판원이었던 폴포츠를 학력이나 재력, 외모 같은 하나의 잣대로만 판단했다면 그는 인생의 낙오자로 끝났어야 한다. 그러나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한 여러 잣대 중 노래라는 다른 잣대를 대었을 때 그는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있었다.
난의 기품이 우월하고, 민들레의 치열함이 열등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면 된다. 신이 인간을 중심으로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지구를 중심에 두고 하늘이 움직인다는 관점에서 보면 '천동설(天動說)'만이 진실이 된다. 그러나 태양을 중심에 두는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그 둘레로 움직인다는 '지동설(地動說)'이 설득력을 얻는다. '천동설'이라는 단 하나의 획일적 잣대만 존재했었다면 근대 과학의 혁명적 발달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을 다 못하는 사람도 없다. '틀림'의 논리에 함몰되지 말고 '다름'의 논리를 인정하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가야 한다.
봄은 언제나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봄은 격렬한 전투가 아니라 조용히 자신을 드러낸다. 잿빛 산하는 푸르고 붉은 원색으로 바뀌고 우리들 마음도 따사로움이 감돈다. 각자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자유를 만끽한다. 상대를 흉보거나 헐뜯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며 조화와 균형으로 제자리를 지켜간다.
그래서 봄은 '한편의 교향악'이다. 원색의 음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아름다운 소리와 거친 소리가 한데 어울려 극상의 음을 만들어 낸다. 봄은 '한편의 시'이기도 하다. 고운 말과 조잡한 말이 서로를 보완하고 감싸주며 지순한 영혼을 지켜간다. 또 자유로움과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본래 색들은 한 폭의 풍경화가 되기도 한다.
한 가지 색상으로는 봄의 아름다움을 만들 수 없다. 희고 붉고 푸른 것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해야 비로소 봄의 미가 완성될 수 있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서는 같이 싸우겠다"는 명언을 남겼다. '천동설'을 지지한다고 해서 '지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화형시키자고 해서는 아니 된다. 좌우를 모두 아우르고 넘어서야 보다 '희망찬 봄'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