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자료

자동차 역사와 우리나라 자동차

yoonwoonam 2012. 11. 9. 14:42

 

자동차 역사

 

자동차역사는 기원전 3,200년경 바퀴가 발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1482년 :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태엽자동차를 고안

1599년 : 시몬 스테빈이 풍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1630년 : 이탈리아의 조반니 브랑카가 증기터빈 원리를 발견

1665년 : 포르투갈의 신부인 프래들린 펠피스트가 바퀴 4개를 단 증기차를 발명

            유명한 영국 제임스 와트가 와트식 증기기관을 발명하기도 합니다.

1698년 : 토머스 서베리는 대기압식 증기기관

1712년 : 영국 토마스 뉴커먼은 첫 상업적 증기기관인 뉴커먼식 증기기관을 만듭니다. 

1765년 : 영국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을 만들게 된다.

1859년 : 벨기에 에티엔트 `르노와르` 는 처음으로 2행정 내연기관을 개발하여 양산화성공, 땅속의 석탄 대신 석유를 동력으로 활용한 첫번째 사건이다.

1862년 : 프랑스 보 드 로사가 4행정 내연기관의 원리를 고안하게 됩니다.

1883년 : 프랑스 알베르드 디옹이 60Km/h로 달리는 증기자동차를 만들고

1885년 : 이탈리아의 조반니 브랑카가 증기터빈 원리를 발견합니다.

1886년은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꼽을 수 있습니다.

          칼 벤츠가 무게 250Kg짜리 자전거 타입 3륜 휘발유 자동차를 발명하게 되죠.

1894년  :  독일 루돌프 디젤이 그 유명한 디젤엔진을 발명 

1895년  : 프랑스 미쉐린 형제가 처음으로 자동차의 공기주입식 타이어를 발명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동차17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한다.

1678년 플랑드르의 성직자였던 페르디낭드 베르비스트가 60센티미터의 작은 증기 자동차를 선보였다.  자동차중국 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였다.

1769년초에는 프랑스공병장교였던 니콜라 조제프 퀴뇨가 2기통 3륜 증기 기관을 탑재한 증기 자동차를 성공적으로 시연해 보였다. 퀴노의 자동차는 1시간이나 달렸지만 브레이크가 없어 파리 시 교외에서 언덕길에서 정지하지 못해 벽에 부딪히는 최초의 자동차 사고를 일으켰다. 

 

그러나 영국리처드 트레비식1801년 증기 마차를 만들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영국에서는 핸드 브레이크, 변속기, 조향 장치 등이 개발된다. 대량 운송수단으로서의 상업적 성공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자동차는 크기도 큰 데다가 속도 또한 너무 빨라 사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이에
1865년 빅토리아 여왕은 최초로 공공 도로에서의 자동차 통행법을 공표하게 된다. 최초의 교통법인 이 적기조례(Red Flag Act)라 불리는 이 법률에는 적색기를 흔들고 경적을 울려야만 보행자를 앞질러 갈 수 있다는 내용, 해가 진 후에는 자동차에 반드시 등불을 달고 다녀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1896년까지 계속된 이 법률로 자동차 개발은 위축을 받게 되고, 대신 증기기관차에 개발이 더 가속화되었다.

 

1895년벤츠 벨로(Benz Velo)

 

한편미국에서는 1789년 올리버 에반스(Oliver Evans)가 미국 최초의 자동차 관련 특허를 취득했다. 이 특허를 이용해 에반스는 1804년 증기기관을 탑재한 자가 추진 자동차를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다. 이 자동차는 육상뿐만이 아니라 수상에서도 이동할 수 있는 미국의 첫 번째 수륙양용 자동차였다.

1860년 벨기에 출신의 에티엔 르와르(Etienne Lenoir)가 석탄가스로 움직이는 2행정 내연기관자동차를 만들었다. 그의 실험은 2마력으로 3시간 동안 7마일을 움직이는 성과를 얻었으나 자동차 연구를 지속하지는 않았다.

 

1880년대 후반 몇몇 독일의 발명가들은 휘발유 내연기관으로 자동차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휘발유 내연기관 자동차칼 벤츠가 선보였다.

그는 1885년 만하임에서 시연을 보이고, 1886년 1월 29일 관련 특허를 취득한 후 1888년 자동차를 생산해 판매를 시작했다.

이 3륜 양산 자동차는 무게가 250킬로그램이고 200알피엠(rpm)에서 0.85마력의 힘을 내는 1기통 4엔진을 얹고 최고 시속 16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었다.

곧이어 1889년 고트리브 다임러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역시 휘발유 내연기관을 장착한 1기통 4륜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들은 1886년 세계 최초의 오토바이를 발명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1885년 칼 벤츠가 세계 최초로 가솔린 엔진 3륜 자동차 `판테트 모터바겐` 을 제작하였다.

 

1926년오스틴 7 박스 살롱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

 

 자동차의 도입

우리 나라의 자동차 역사는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1903년)을 기념하여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서 프랑스 공사가 1908년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기록이후 한일합방체결 이듬해인 1911년 고종황제 어차로 사용하기위한 다이뮐러 승용차와 일본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사용하게 들여온 영국제 위슬리 1대가 정식 수입되어 사용되었고 2년뒤에는 황태자(이후 순종)가 사용하기위한 미국제 캐딜락 1대가 들여오게 된다.

 

자동차 운송 산업

 

국내 최초의 자동차 운송산업은 1912년 버스(8인승 승합차)사업 이었다.

일본인 에가와가 마산에서 진주, 진주에서 삼천포간 운행하는  영업허가를 받으므로써 시작되었다.

이때 책정된 요금은 마산 진주간이 3원 80전, 진주 삼천포간이 1원 30전이었다. 이때 쌀 한가마니 값이 3~4원, 미장이 하루 삯이 60전 정도 였다고 한다.

이후 1914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정기 노선 버스가 생기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자동차 운송사업이 잘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의 부호들이 운송사업에  뛰어들면서 1917년에는 자동차 운송업체의 수가 153개 운송 노선의 길이가 1,100Km에 이르게 된다.

1918년말경 전국의 자동차 보유댓수가 212대, 1922년 8월에는 자동차수가 840대, 그중 서울에 212대가 운행하기에 이르른다.

 

자동차 부품 산업의 태동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동차 개조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자동차 부품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게되어 자동차 부푸을 생산하는 업체가 생기고, 그 수 또한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1953년 한국전쟁이후 자동차 수리업체들이 성업하게 되면서 자동차 부품의 생산업체가 늘어나게 된다.

 

시발 자동차의 탄생

1955 "국제 공업사"라는 자동차 정비및 개조 공장을 운영하던 최무성 삼형제의 손에 의해 "시발(始發) 자동차" 라는 미국산 윌리스지프를 모델로하는 국산 차량이 최초로 탄생하게 됩니다. 놀라운것은 이 시발 자동차의 엔진이 지프엔진을 그대로 모방해서 만든 국산 엔진이라는 사실입니다.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기념 산업 박람회에서 시발자동차가 이승만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인기가 치솟으며 날개 돋친듯 팔려 나가며 최씨 삼형제는 돈방석에 앉게되며, 이름도 시발자동차(주)로 바꾸게 됩니다.

1962년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에 의해 소형자동차공장으로 " 새나라 자동차"가 선정되어  일본 닛산과 기술 제휴로 닛산 블루버드 400대를 수입하고 부평공장에서 SKD(Semi Knock Down)로 조립생산을 하며 점차 국산화 CKD로 대체하여 국산화율을 높여가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 1962년에는 하동환자동차제작소가 설립이 됩니다. 이후에 동아자동차라는 회사가 되는 다른 자동차 생산업체가 설립이 것이지요. 또한 1962 5월에는 기아산업주식회사가 이륜 오토바이 생산을 시작하게 됩니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내연기관으로 교통수단이 하나 둘씩 국내기술로 제작되기에 이른 것이지요. 그러다가 1963 기아산업주식회사는 바퀴가 세개로 움직이는 화물차를 국내시장에 내놓게 됩니다. 일본의 마쓰다와 기술 제휴로 356cc 3 화물차인 K-360 생산하게 됩니다.

기아자동차는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름처럼 새롭게 도약하면서 자동차 업계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1967년에 현대자동차가 설립이 되는 것인데요. 현대는 미국 포드와 손을 잡고 1968년부터 코티나라는 자동차를 생산하기에 이릅니다. 현대의 코티나는 신진의 코로나급 정도되는 중형세단인 합니다새롭게 등장한 현대자동차는 신진자동차의 막강한 경쟁자가 됩니다. 1968 5월에 현대자동차는 울산에 20만평 부지를 확보하였으며 연간 3,500 정도를 생산할 있는 현대식 생산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릅니다. 1968 11월에는 국산화율이 21% 정도에 이르는 코티나 1600D 모델을 양산하기에 이르지요. 당시에 미국은 한창 베트남전을 벌이고 있을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1969년에는 국내자동차를 수출하는 일도 있었던 같습니다. 나중에 동아자동차가 되는 하동환자동차에서 1969 8월에 대형버스를 최초로 베트남에 수출을 했었다는 기록이 있네요 

 

1970년대의 자동차 시장

 

 70년대를 시작으로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들이 잇달아 개통이 되게 됩니다. 1970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그리고 1971년에는 영동고속도로가 그리고 1973년에는 호남고속도로가 개통이 되게 됩니다. 이제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면 지방까지 쏜살같이 있는 그런 상황이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자동차 산업은 70년대에 들어와서 급성장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1972년에 도요타는 중국시장에 진출하기 위하여 신진자동차와 결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신진자동차는 미국의 GM (General Motors) 합작으로 GM코리아를 설립하여 국내에서 시보레와 레코드를 양산하게 됩니다.

현대자동차는 1974년에 이탈리아 디자이너를 고용하여 최초의 국산차종을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자동차의 이름은 포니 (Pony)였었습니다. 이후 강력한 폭풍을 몰고 자동차가 현대자동차 연구실에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와중에 기존의 3 구조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1976년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GM코리아의 (전신이 신진자동차였었지요) 지분을 산업은행이 모두 인수하게 됨으로써 회사명이 새한자동차로 변경이 되게 됩니다.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3 체계를 이루던 신진(GM코리아), 현대 아세아자동차라는 경쟁체계에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1976 10월에 기아산업은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게 됩니다. 아마도 브리사 자동차의 위력이었다고 이야기할 있나요? 하여간 기존 3 중에 하나가 이렇게 사라졌고요. 뒤이어 1978 산업은행은 가지고 있던 GM코리아의 지분을 모두 대우에 매각하게 됨으로써 대우자동차가 탄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 3 중에는 현대자동차만이 남은 것이 되는데 말이죠. 바로 1974년부터 디자인을 해왔던 포니 (Pony) 국내에서 양산하기 시작을 합니다. 이후 국내 모델로는 최초로 베네주엘라에 수출을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1962 년 : 새나라 자동차 시범 조립생산

1967 년 : 현대자동차 법인 설립

1968 년 :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준공 미국 포드자동차 합작 생산

             대우자동차 전신(신진/새한) 합병 공동개발

1975 년 :  국내 기술로 현대포니 생산
1977 년 : 코티나 생산
1982 년 : 포니2 생산
1983 년 : 스텔라 생산
1985 년 : 엑셀 생산
1986 년 : 그랜저 생산
1988 년 : 소나타 생산
1990 년 : 엘란트라 생산
1992 년 : 뉴 그랜저 생산
1995 년 : 아반테 생산
1996 년 : 다이너스티 생산
1998 년 : 그랜저 XG 생산를 생산하게 됩니다.

 

 

 

 

 

 

'기타 >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DAC(Digital Analog Converter)  (0) 2013.05.09
꽃피는 모습  (0) 2013.01.21
OTT 셋톱박스 사업자 동향  (0) 2012.03.23
OTT 서비스의 이해   (0) 2012.03.23
오클리 RADAR 렌즈교환법  (0) 2011.09.05